빛과 실, 한강 노벨상 후 첫 신간 - 미발표 산문 3편·노벨상 강연문·시 등 12편 수록

© 전명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신작 산문
빛과 실
마침내 우리 곁에 당도한 봄,
깨어나는 연듯빛 생명의 경이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빛과 실: 한강의 내밀한 사유와 빛나는 언어의 정원
빛의 선율이 생명을 깨우는 봄날,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한강의 신작 산문집 『빛과 실』이 독자들을 찾아온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이 책은 작가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온 사색의 조각들을 정교하게 엮어낸 깊은 사유의 풍경화다.
『빛과 실』은 오늘(4월 23일)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하며,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24일부터 만날 수 있다.
빛으로 수놓은 언어의 정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는 이 산문집은 172쪽의 분량으로,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아홉 번째 작품이다. 5편의 시를 포함해 총 12편의 글이 실린 이 책에는 작년 12월 스웨덴 한림원에서 진행된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빛과 실」, 시상식 직후 연회에서 밝힌 수상소감 「가장 어두운 밤에도」, 노벨상 박물관에 찻잔을 기증하며 남긴 메시지 「작은 찻잔」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처음 공개되는 산문 「북향 정원」, 「정원 일기」, 「더 살아낸 뒤」와 기존에 발표된 산문 「출간 후에」, 그리고 시 「코트와 나」, 「북향 방」, 「(고통에 대한 명상)」, 「소리(들)」, 「아주 작은 눈송이」 등이 수록되었다. 이 중 「소리(들)」은 작년 광주비엔날레 개막 공연을 위해 쓴 시를 수정한 것이며, 다른 네 편의 시는 「문학과사회」, 「릿터」 등 문예지에 실린 작품들이다.
빛을 향한 사색의 여정
「북향 정원」은 한강이 2019년 북향 정원이 딸린 집으로 이사한 후 정원을 가꾸며 경험한 내밀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 빛이 충분히 들지 않는 북향 정원에서 미스김 라일락, 청단풍, 불두화 등 음지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을 키우며, 작가는 여덟 개의 탁상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식물들에게 빛을 선물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의, 감각을 그렇게 익히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이 일이 나의 형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지난 삼 년 동안 서서히 감각해왔다"고 털어놓는다.
「정원 일기」는 정원의 변화와 함께한 작가의 일상을 날짜별로 기록한 글로, 2021년 4월에는 "칠 년 동안 써온 소설을 완성했다"는 기록과 함께 "USB 메모리를 청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저녁 내내 걸었다"는 소박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고백이 담겨 있다.
글쓰기, 생명과의 깊은 대화
책의 마지막에 실린 「더 살아낸 뒤」는 글쓰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 (글쓰기로.) // 사람들을 만났어. / 아주 깊게. 진하게. / (글쓰기로.) // 충분히 살아냈어. / (글쓰기로.)" 문장마다 다른 행으로 나뉘어 있어 운문으로도 읽히는 이 산문은, 글쓰기를 통해 세계와 맺는 작가의 본질적 관계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책의 표지와 본문에는 한강이 직접 촬영한 정원과 작업 공간, 노벨박물관에 기증한 찻잔의 사진들이 담겨 있다. 특히 마지막 장에는 작가가 노벨상 강연에서 언급했던 여덟 살 때 쓴 시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사랑이란 어디있을까? / 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 사랑이란 무얼까? /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 아름다운 금실이지"라는 유년의 질문은 그의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화두로 남아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포함
미발표 시와 산문, 정원 일기 수록
한강은 문학과지성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199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는 문학 잡지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한강현'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붉은 닻」을 투고해 당선됐는데, 당시 심사위원이 문학과지성사의 창간 멤버인 김병익 문학평론가였다.
문학동네와 창비가 「채식주의자」(2007), 「소년이 온다」(2014), 「작별하지 않는다」(2021) 등 주요 장편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초기작 다수와 시집 판권을 갖고 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을 비롯해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2002), 「바람이 분다, 가라」(2010), 소설집 「노랑무늬영원」(2012),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 등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노벨상 이후의 첫 걸음, 그리고 다음 여정
한강은 기존에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와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2009)을 출간한 바 있으나 모두 절판되어, 이번 「빛과 실」은 현재 구매 가능한 유일한 산문집이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의 책 누적 판매 부수는 300만부 안팎으로 추정되며, 특히 지난해 10월 이후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서만 약 270만부가 판매되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시상식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해외 행사 초청도 대부분 거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책 홍보도 최소화하는 분위기로, 출판사와 서점 등 업계 관계자들은 조용히 물밑에서 출간 막바지 작업을 진행했다. 작가는 '책을 통해서만 말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한강은 소설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집필 중으로, 이르면 올해 출간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2015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과 2019년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작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작별하지 않는다」(2021)와 관련해 작가는 "이번 소설을 「눈」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했는데 독립해서 나왔다"며 "다시 세 번째 이야기를 써서 3부작을 완성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빛과 실」을 통해 독자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내밀한 사유와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작가가 말한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손길로 가꾸어진 북향 정원처럼, 이 산문집은 햇빛이 스미는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깊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 준비를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