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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 아래 땅을 밟고, 바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된다
  • 전원의 아침은 새소리로 시작되고, 저녁은 별빛으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유와 행복이다
  • 나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었다. 인생을 의식적으로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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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대 쪽으로

by 우중래객 2025. 2. 21.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꺽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