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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book

이포나루와 파사산성

by 우중래객 2021. 1. 2.

 

이포나루와 파사산성

여주에서 남한강을 따라 가다 보면 그 중류쯤에 천서리가 나오고, 남한강을 건너는 이포대교가 놓여 있다. 한때는 이포나루로 유명했던 곳인데 지금은 간 곳이 없다. 강물을 따라 이동하는 배가 중요한 운반·교통 수단이었던 조선시대까지 한양과 강원도를 잇는 번화한 나루였던 것이다.

대개의 포구가 그러하듯 이포나루 역시 많은 애환을 품고 있는 곳이다. 세조 2년(1456)에 폐위된 단종은 강원도 영월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한양의 광진나루에서 뱃길을 따라 내려온 단종은 이곳 이포나루에서도 잠시 내려 눈물을 뿌렸다. 그때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이 여기서 가까운 대신면에 있다.

조선의 것이라면 모두 거두어가던 일제시대에는 여주와 양평의 곡물들이 이곳 이포나루를 거쳐 인천으로 운반되는 한스러움을 겪었다. 그만하면 역사의 한자락 끝을 차지해도 괜찮을 이포나루이다.

이포나루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해발 230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이 보인다. 천서리 파사산이다. 천서리(西)는 이름 그대로 남한강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파사산()의 유래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혹자는 먼 옛날 파사국()의 자리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5대왕인 파사왕(재위 80∼111) 때 성을 쌓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파사산성에서 내려다본 천서리 일대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한양과 강원도를 이어주던 천서리 이포나루에 다리가 놓여 옛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여주·이천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은 예나 다름없다.

능선을 따라 둘레 1,800m, 높이 6.25m의 퇴뫼형 파사산성이 자리잡은 파사산을 올라보면 야산이라 얕잡아볼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 주변으로 잡풀과 나무들이 무성해 발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동문터와 서문터가 남아 있긴 하지만 오랜 세월 돌보는 이 하나 없었던 모양이다. 석축은 몇 군데를 제외하곤 곳곳이 무너졌다.

 

파사산성의 석축오랜 세월 돌보는 이 하나 없어 몇 군데의 석축을 제외하고는 곳곳이 무너져 있다.

그러나 주춧돌만 남아 있는 산정에 오르면 이 성의 입지조건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가 있다. 여주·이천·양평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한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수자원이 풍부한데다 여주 하면 곡창지대인만큼 군량미의 축적도 손쉬웠을 것이다. 강의 상류 쪽으로는 여주와 충주·탄금대로 이어져 문경새재에 닿고, 하류 쪽으로는 양평·양수리·한양으로 이어지니 서해로 빠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반면 적군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니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진흥왕(재위 540∼576)은 553년에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고 지방 군사행정조직인 10정의 하나로 골내근정()을 이곳에 두었으며, 대규모의 석성을 쌓았다.

다시 그로부터 약 천 년 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병장 의암()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하였다. 지금은 산성 곳곳이 무너져내렸지만 이 산성이 여러 시대에 걸쳐 쌓은 성임을 확인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여주목 고적조」에 "옛 산성이 주()의 북쪽 53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3만 8,825척()이다"라는 짧은 기록이 남아 있으나 파사산성의 중요성은 사적(제251호)으로 지정하기에 충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포나루와 파사산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초판 1996., 15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