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原州興法寺址 這空大白塔碑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흥법사에 머물다가 태조 23년(940년)에 입적하였다.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을 정도로 진공대사는 당대의 존경받는 고승이자 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태조 24년(941년) 진공대사 충담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탑비의 받침 부분인 귀부는 용에 가까운 모습으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형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만권 자와 연꽃무늬가 있다. 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휘젓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이 당시의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 준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原州國法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흥법사 터로 전해지는 곳에 있는 탑으로, 이중인 받침돌 위에 몸돌 세 층을 쌓아 올린 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따랐다. 받침돌인 기단基壇에 비해 몸돌의 폭과 높이가 크게 줄어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다.
1층 받침돌 각 면에는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세 구씩 조각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과 문고리 장식을 새겼는데, 이는 이곳에 부처의 사리를 모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탑의 전체적인 비례, 탑의 구성이나 각 부분의 조각 기법, 장식 등으로 보아, 이 탑은 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전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흥법사지
興法寺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
흥법사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진공대사탑비에 진공대사가 태조 23년940에 이곳에서 입적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 말에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법사는 왕사 였던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할 때까지 머무른 곳으로, 태조 왕건이 직접 글을 지은 진공대사탑비가 남아있다. 탑비에 기록된 당시의 시찰 명칭은 興法禪院이었다. 고려 태조가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거론시지 · 여주 고달사지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사찰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법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숙종 19년 1693에 이곳에 도천서원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진공대사탑비와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이 외에도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