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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book

소수서원

by 우중래객 2021. 1. 4.

소수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소수서원은 서원 동쪽에 죽계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입구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았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論)과 경(敬) 사상을 수용코자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을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는 설립 동기가 적혀 있다.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宿水寺) 옛터로 안향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현재 서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주세붕은 구름과 산, 그리고 강물이 골짜기에 가득한 곳에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황은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하였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면이 한 단 높아져, 이곳부터 서원 경내임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인 사주문(四柱門)으로 통하는 길 왼쪽으로는 성생단(省牲壇)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죽계수(竹溪水)가 내려다보이도록 지은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성생단은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壇)으로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왔다.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경렴정 동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이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또 '경'자 위에 '백운동'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경렴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는 주세붕이 쓴 '경(敬)', 이황이 쓴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소수서원에는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교수의 숙소인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한 학구재(學求齋)·지락재(至樂齋)를 비롯하여 서책을 보관하던 장서각(藏書閣), 제수를 차리던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고, 최근에 세워진 건물로 유물관, 충효사료관 등이 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강당이다.
사당에는 안축(安軸, 1287∼1348)과 그의 아우인 안보(安輔, 1302∼1357)가 1544년(중종 39)에, 주세붕이 1633년(인조 11)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안축은 안향의 삼종손(三從孫)이다. 그가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이름난 경기체가(景幾體歌)로 국문학사상 귀중한 사료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하지 않고 존속한 서원 47곳 중의 하나로,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수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