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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 아래 땅을 밟고, 바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된다
  • 전원의 아침은 새소리로 시작되고, 저녁은 별빛으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유와 행복이다
  • 나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었다. 인생을 의식적으로 살고 싶었다
책 book

안녕 주정뱅이/술꾼들의 모국어/오늘 뭐 먹지? - 권여선

by 우중래객 2025. 4. 10.

인생이 던지는 잔혹한 농담,
그 비극을 견디는 자들이 그리는 아름다운 생의 무늬

한국문학의 대표작가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예스24 한정 특별판으로 선보인다. 이번 특별판은 화가 임수진의 그림으로 표지를 디자인하여 더욱더 눈길을 끈다. 잔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빛을 그려낸 임수진의 작품은 권여선의 소설이 가진 쓸쓸하고도 서늘한 정조를 잘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특출한 성취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제4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권여선의 이 소설집은 이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을 잡아채는 선명하고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다. 인생이 던지는 지독한 농담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미세한 균열로도 생은 완전히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감각을 발휘해온 권여선은 그럼에도 그 비극을 견뎌내는 자들의 숭고함을 가슴 먹먹하게 그려낸다.

권여선 (Kwon Yeo-Sun)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2007년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도 제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저서로는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있다.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들거나 술을 마신다…

지독한 생에 거꾸러진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8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봄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일으킨 사업으로 제법 돈을 벌지만 곧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술 때문에 생활이 마비돼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영경 앞에 수환이 나타났을 때, 영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28면)

더한 불행이 있을까 싶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병까지 찾아오고,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만 남은 상태로 그들은 죽음 앞에 예정된 이별과 가차없는 삶을 사랑의 형식으로 견뎌낸다.

인생에 결코 지지 않은 인물은 「이모」에도 등장한다.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다. 착취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가족 곁을 완전히 떠나기 전 5년간 악착같이 모은 1억 5천만원에서 1억은 아파트 보증금으로, 남은 5천만원으로는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 결심한 ‘이모’가 췌장암으로 죽기 전까지 살아간 2년의 삶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씻고 열시쯤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간다. 필기도구와 지갑, 열쇠가 든 가방에 보리차를 담은 물병을 챙긴다. (…) 도서관에 가면 일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그 책만 읽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 오후 두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가서 문을 닫는 여섯시까지 책을 읽는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대출해 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들기 전까지 마저 읽는다.(83~84면)

‘이모’가 처음부터 이렇듯 고독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은 시작부터 이상한 날이었다”(90면)는 말을 기점으로 이모는 인생을 바꿔놓은 겨울밤의 한 장면에 대해 말한다. ‘이모’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눈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슬쩍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단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찰나의 진실을 예민한 관찰자의 언어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관찰자적 면모는 세사람의 짧은 여행을 다룬 「삼인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와 ‘주란’ 부부의 하룻밤 이별여행에 친구 ‘훈’이 가세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에피소드와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세사람의 언쟁을 고스란히 중계한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이 지상목표라는 듯 먼 길을 돌고 돌며 끝을 유예하는 듯한 그들 여행을 초점화자 ‘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을 슬쩍 맞닥뜨릴 수 있다.

권여선은 또한 신경증자를 그려내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역광」에는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서 불안장애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예소설가 ‘그녀’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끌고 오던 인물과 사건이 모두 애초 없었던 일이라는 듯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이름(‘위현僞現’)처럼 ‘모든 것이 거짓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듯 이 소설의 결말은 ‘그녀’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다 알코올중독이 되어버린 「봄밤」의 영경이 술에 취한 채 김수영의 시를 큰 소리로 외는 장면은 그중 단연 압권이다. 바닥을 맞닥뜨린 자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며 취기 어린 인물의 행동을 복기해내는 권여선의 언어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한다.

 



젊음은 스러지고 몸은 늙어간다. 다시 술을 마신다. 기억은 믿을 수 없고 몸이 아프다. 죽음의 그림자가 사방에서 어른거린다. 어둡고 불길하며, 때론 눈물이 난다. 그녀는 마른 팔이 부러져라, 온 힘을 다해 활시위를 당긴다. 아득히 먼 과거에서 지금 여기를 향해. 스러져가는 한 세대의 진혼곡은 그렇게 우리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힌다. 이토록 생생한 아픔이라니! 이토록 지독한 순수라니!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은 한국문학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살촉처럼 선연한 언어들은 여전히 푸르게 살아 있고 그녀는 아무도 가닿은 적 없는 기억의 심연으로 우리를 잡아 이끈다. 그 경이로운 소명의식이 피 흘리는 예수처럼 숭고하다. 그래서 오래오래 그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잊지 마라. 제발 잊지 마라!
- 천명관 (소설가)



주류(酒類)문학의 위엄을 보라,고 어느새 속으로 외치고 있다. 술을 적대해온 나는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때로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셔도 좋은, 아니 마셔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취한 감각에 기록되는 다른 질감의 세계, 삶과 인간을 재는 다른 방식의 산술, 기만과 연민의 경계를 지워가며 구축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서늘하게 포착하며 권여선의 화자는 결코 독자의 짐작을 놓치는 법이 없다. 주정뱅이들의 세계에서 그 맨정신은 한층 뚜렷하고, 일그러짐으로써 더 선명해진 그 풍경이 권여선만의 고유함이다. 그녀의 소설이 어떤 근본적인 사람됨과 세상됨의 배치를 보여준다면 그 배치는 뼈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장기(臟器)처럼 뭉클하게 잡히는 어떤 것이다. 알코올중독이 그렇듯이 좋은 소설이 만들어내는 “모든 신체적 감정적 반응들이 거짓”이라 해도 이 거짓보다 나은 진실의 존재형태가 있을까. 술 마시는 자들을 이야기하는 권여선의 소설, 이 두겹의 거짓이 전달하는 위태하고도 매혹적인 서사, 그리고 한층 깊어진 이해와 연민에 나는 그만 설득되고 만다.
- 황정아 (문학평론가)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소설가 권여선이 쓰는 안주 일체, 인생 일체

먹고 마시는 이야기에서 느껴버리는 모국어의 힘

유려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한국문학이 가장 신뢰하는 이름이 된 작가 권여선. 2023년 제8회 김승옥문학상, 2021년 제15회 김유정문학상, 2018년 제19회 이효석문학상, 2016년 제47회 동인문학상, 2015년 제18회 동리문학상, 2012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2007년 제15회 오영수문학상 등 유수의 상을 거느림은 물론 동료 소설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 등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사반세기가 넘게 글쓰기에 매진해온 작가. 특히 술과 인생을 애틋하게 이야기한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부터 최근작 『각각의 계절』(문학동네, 2023)까지“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고 이 삶에 가장 알맞은 소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권여선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삶에 가장 알맞은 소설을 아는 작가’가 2018년 출간한 『오늘 뭐 먹지?』는 저자의 처음이자 유일한 산문집이다. 술과 안주, 음식 등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쓴 이 책은 많은 독자의 ‘맛깔나는 인생 산문’으로 자리매김했다. 후속작을 기다려온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출간 6주년 기념 특별 개정판을 선보인다. 정겨운 그림으로 사랑받아온 치커리 화가와 협업해 본문 삽화를 전면 교체하고, 지금껏 작품세계를 들여다본 심도 깊은 작가 인터뷰를 수록했다. ‘주류(酒類) 문학의 위엄’이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는 저자가 작품에서는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먹고 마시는 이야기들을 통해 권여선만이 쓸 수 있는 산문의 풍요로움을 다시금 일깨운다.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A와 B가 만나 자연스럽게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내용을 쓰다 화들짝 놀라 삭제 키를 누르거나 통째로 들어내는 일이 잦다보니 글의 흐름이 끊기고 진도가 안 나가고 슬럼프에 빠졌다. 모국어를 잃은 작가의 심정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나의 모국어인 술국어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그 결과 주인공이 술집에 들어가긴 했으나 밥만 먹고 나오는 장면으로 소설을 마감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러자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고 술 얘기가 쓰고 싶었겠는가.

 


술꾼이 딱 그렇다.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p.7

그렇게 일취월장, 내 입맛은 소주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

p.23

김밥은 너그러운 음식이다. 김과 밥만 있으면 나머지 재료는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김밥은 아름다운 음식이다. 재료의 색깔만 잘 맞추면 이보다 어여쁜 먹거리가 없다. 그래서 김밥에는 꽃놀이와 나들이의 유혹이 배어 있는지 모른다. 지참하기 간단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꽃밭을 닮아서.

p.39

이십 대 후반에 처음으로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살을 빼기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살다보면 내 속에 뭔가 쓸데없는 것이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가 심히 그랬던 시기였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서랍처럼, 남루한 후회가 쌓여 있고 부서진 계획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어둠침침한 우울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던 시기. 머릿속이든 몸속이든 일단 말끔히 비우고 싶어 충동적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단식은 식욕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단식 첫날처럼 긴 하루는 없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이상하게 시간도 안 간다. 굶어보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먹는 일들을 중심으로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는지 알게 된다.

p.61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을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pp.68~69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 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다.

p.69

이제 나는 물냉면이라면 환장하는 사람이 되었고, ‘해장에는 냉면’이라는 오래전 선배의 말을 백번 이해하게 되었고, 물냉면 전문집에서 비빔냉면을 시키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비틀게 되었다.

p.82

차지고 부드럽게 후루룩 넘어가는 회와 오독오독 씹히는 해산물과 싱싱한 야채와 매콤새콤한 국물까지 그야말로 통쾌하고 상쾌한 맛이었다. 땀과 더위와 앞으로 써야 할 글의 부담까지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맛이었다.

p.89

한여름 대낮에 깡장과 고추장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 비로소 나는 내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다. 여름은 내게 한때는 땀과 벌레의 계절이었고, 한때는 불면과 실연의 계절이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땡초의 계절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계절을, 그 여름의 열기를,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땡초를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매운 음식에 대한 나의 광적인 애호에 대해 나는 이보다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p.102~103

바삭한 가을 햇빛과 씁쓸한 땅의 맛을 은은하게 간직한 시래기나물의 독특한 맛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저 나는 이게 바로 까막고기의 맛이려니 할 뿐이다.

p.113

지금 우리 집 냉동실에는 백명란과 시래기가 봉지봉지 얼어 있고 냉장실에는 소고기장조림, 오이지무침, 가죽장아찌가 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당장 소주 한 병을 따도 곧바로 안주 한 상을 차려낼 수 있다. 공부와 음주의 공통점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p.117~118

식탐자는 맛에 대한 욕망만큼 온도에 대한 욕망도 크다. 낮에는 여전히 찌는 날씨여도 이미 입속엔 가을이 깃들고 뜨거운 국물 음식이 그리워진다.

p.121

뭔가를 먹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맛과 온도도 중요하지만, 원하는 스타일로 먹는 것도 중요하다. 밥 먹을 때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개도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로 음식을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p.124

각자의 혀에는 각자가 먹고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혀의 개성은 절대적이며, 그 개성은 평균적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p.136

먹는 얘기를 하다보면 이렇게 뜻밖의 바람직한 술자리를 낳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p.139~140

봄에 싹텄던 것들은 여름에 왕성히 자라 마침내 가을이면 완숙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맛에 있어서만은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절정은 단맛으로 표현된다. 모든 먹을거리들은 가을에 가장 달콤해진다.

p.143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 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게다리를 넣어 구수한 단맛이 도는 무된장국을 한술 떠먹는다. 그러면 내 혀는 단풍잎처럼 겸허한 행복으로 물든다.

p.152

가끔 견딜 수 없이 어떤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무언가가 몹시 먹고 싶을 때 ‘목에서 손이 나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내 목에서는 커다란 국자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당장 그 국물을, 바로 그 국물을, 다른 국물이 아닌 바로 그 국물의 첫맛을 커다란 국자로 퍼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지는 것이다.

p.162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밥은 소박하지만 맛깔난 손맛이 담긴 밥상을 의미한다.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집에서 해 먹는 게 집밥이라면, 집집마다 그 집 부엌칼을 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죄다 소박하면서 맛깔날 수 있단 말인가.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p.183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소설가 권여선의 ‘음식’ 산문을 가장한 ‘안주’ 산문집

먹고 마시는 이야기에서 느껴버리는 모국어의 힘

2016년 제47회 동인문학상, 2015년 제18회 동리문학상, 2012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2007년 제15회 오영수문학상 수상 작가 권여선의 첫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주류(酒類) 문학의 위엄’이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는 저자가 ‘음식’ 산문을 청탁받고 쓴 사실상의 ‘안주’ 산문집이다. 소설에서는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먹고 마시는 이야기들이 본격적으로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책에서는 계절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식들이 총 5부, 20개 장에 걸쳐 소개된다. 대학 시절 처음 순대를 먹은 후 미각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입맛을 넓혀가기 시작한 저자에게(‘라일락과 순대’) 먹는 행위는 하루를 세세히 구분 짓게 하며, 음식은 ‘위기와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화해와 위안을 주기’도 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매운 음식에 대한 애정(‘땡초의 계절’)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고, 단식 이후 맛보는 ‘간기’는 부활의 음식에 다름 아니다(‘젓갈과 죽의 마리아주’). 창작촌 작가들과의 만남에서도(‘급식의 온도’), 동네 중국집 독자와의 만남에서도(‘졌다, 간짜장에게’) 음식은 새로운 관계 맺음에서 제대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이 밖에도 제철 재료를 고르고, 공들여 손질을 하고, 조리하고 먹는 과정까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야말로 최고의 음식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을, 쾌감에 가까운 모국어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산문집은 주류(酒類) 문학의 대가 권여선이 소설에서는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하지 못할 그야말로 ‘혀의 언어’로 차려낸 진수성찬이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오늘 안주 뭐 먹지?”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술꾼들의 모국어」중에서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벗들의 권유로 처음엔 오만상을 찡그리며 순대 하나를 먹었지만 오물오물 씹고 나더니 의외로 맛이 괜찮다며 또 하나를 먹었고, 급기야 나중에는 너무 맛있다며 순대를 마구 집어삼켰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친구의 증언 외에 내 속에서 나온 강력한 물증까지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순대를 잘 먹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소 역겨운 안주가 나와도 ‘에잇! 나는 순대도 먹은 년인데 이 정도야!’하는 정신력으로 눈 딱 감고 먹게 되었다.

---「라일락과 순대」중에서

비싼 백명란은 한 쌍씩 랩으로 곱게 싸서 유리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먹고 싶을 때 바로 꺼내 사각사각 썰어 다진 파와 참기름을 뿌려 구운 김에 싼 밥 위에 얹어 먹는다. 이때 밥은 아무리 여름이어도 따뜻해야 좋다. 따뜻한 밥 위에 셔벗처럼 섞이는 언 명란 맛이 기가 막히다. 저렴한 파지명란은 깨진 명란을 말하는데, 기왕 깨진 것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진 파에 매운 고추를 왕창 다져 넣고 야무지게 섞어놓는다. (…) 주로 파지명란은 반찬으로 먹고 백명란은 안주로 먹는다. 안주는 소중하니까.

---「여름나기 밑반찬 열전」중에서

오늘 밤 나는 심심하게 된장을 풀고 맛국물용 흑새우 몇 마리 넣고 아욱 넣고 두부 몇 점 넣어 된장국을 끓였다. 삐득삐득 고등어 중 한 마리는 바작바작 굽고 한 마리는 감자 깔고 땡초 넣은 양념에 맵게 조렸다. 생선을 말리면 살이 단단해지고 깊은 맛이 난다. 뜨거운 밥 한술에 구운 고등어 살을 뜯어 먹는 맛은 기름지고 고소하고, 소주 한 모금에 땡초 곁들여 조린 고등어 살을 먹는 맛은 배릿하고 칼칼하다. 고등어조림의 감자를 잘라 먹거나 아욱된장국을 떠먹으면 입안의 비린내가 싹 가신다.

---「삐득삐득 고등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