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 주산지
정성으로 물을 가두다
사계절 변화를 잘 포착한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다. 김기덕 감독의 2003년 작품으로, 국외의 관심까지 집중된 바 있다. 영화 흐름의 배경에는 청송군 주산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계절 별로 이어진다. 시청 후 감동을 품고 겨울 분위기 진동하는 주산지를 찾았다.
경상북도 청송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가본 사람보다 안 가본 사람이 더 많다. 사과로 유명해, 지명은 익숙하다는 반응이다. 옛말에 청송은 '끝없는 산길을 걸어 고개를 넘고 계곡을 지나야만 당도하는 곳'이라고 전한다. 그만큼 지형이 험준해 가는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자연 그대로 모습과 시골의 후덕한 풍경이 가득할 테니 말이다.
청송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동쪽 불로장생의 신선이 사는 세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을 뜻한다. 이런 유래는 청송군 사람의 삶에도 깊숙이 배어 있으리라. 올해 6월 청송군은 슬로시티로 지정돼 그들만의 '느리게 사는 미학'을 뽐냈다. 신선의 세계에서 슬로시티로 이어지는 청송의 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곳', 여기의 자연과 인간은 어떤 조화를 이뤘을지 궁금하다.
호숫가 외곽으로 볼 수 있는 왕버들
안동을 지나 청송군에 진입, 작은 산고개 두어 개는 더 넘어야 주산지에 도착한다. 고불고불한 도로가 꽤나 거칠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고개 하나쯤은 기본이다. 청송군은 태백산맥과 가까운 서쪽지방이다. 그래서 청송군의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태백산맥의 여맥으로 겹겹이 둘렸다. 이 때문에 평지가 드문 편으로, 경지면적이 전체의 10% 수준이다. 지형의 높낮이 변화가 심해 타지 사람이 청송에 오면 이동에 불편을 느끼겠지만, 청송 사람들은 “그래서 여기가 좋다우”라며 웃어넘긴다.
주왕산, 주산지, 얼음골 등 관광지 안내 표지판이 여러 곳에 설치됐다. 도로 또한 갈리는 지점이 드물어, 길 찾기가 수월하다. 주산지 휴게소에 따로 주차장이 마련됐으며 남은 550m는 산책길로 조성돼 걸어가면 된다. “따땃한 오뎅 하나 드시소”
휴게소 문틈 사이로 유혹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그 목소리가 참 정겹다. 매점도 붙어 있어 간단한 간식거리와 물을 사야겠다 싶어 들어가 본다. 방금 물이 끓기 시작했다며 “하나 잡숫고 불에 몸 좀 녹이고 가시소”라는 주인장 말이 훈훈하다. 따뜻한 국물과 난로 열기에 추위는 금세 사라지고, 장작 타는 소리에 노곤하기까지 하다.
간단한 채비를 마치고 주산지로 향한다. 작은 계곡이 있고 물이 흐르는데, 자연이 만든 얼음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끈다. 잠시 계곡에 내려와 사진도 찍고, 계곡 물소리에 마음을 달래본다. 산책로 주위로 낙엽송이라는 나무가 즐비하다. 경사라고 할 것도 없는 평탄한 길을 따라 좀 더 계곡을 들어가면 어느 순간 산세에 둘린 주산지가 드러난다.
기록에 따르면, 주산지는 조선 숙종 1720년에 착공, 땅을 파고 그 주위에 둑을 쌓아 경종 1721년에 완공했다. 이후 약 300년 동안 주위 산골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에 고여 왔다. 이렇게 모인 물은 아랫마을 '이전리' 농민의 농업용수로 사용됐으며, 만들어진 이후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터를 잘 잡은 것은 물론, 이전리 농민에게 이만한 효자가 없겠다.
용도도 용도지만, 이제는 이곳의 풍경이 주산지를 알리는 일등공신이 됐다.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주산지를 찾는 발길이 급속도로 늘었다. 개봉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를 본 외국인이 혼자서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저수지 주위는 주왕산 자락이 뻗어 병풍을 둘렀다. 손으로 호수를 감싼 듯한 형상으로 푸근한 분위기다. 입구 건너편은 산세가 서로 내리막으로 만나 시원한 풍경을 전한다. 인공 저수지임에도 어색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라고는 믿지 않는 신비함이 꼭꼭 숨었다.
주산지가 다른 호수에 비해 돋보이는 이유는 수려한 산세의 병풍과 더불어 '왕버들'이란 나무의 역할이 크다. 왕버들은 국내 30여 종의 버드나무 중 하나로,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다. 수면에서 큰 줄기가 뻗은 왕버들은 주산지 말고는 찾기 어려운 장관이다. 이곳의 왕버들 수령은 대부분 300년 이상이라고 하니 그 풍모 또한 남다르다.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남은 왕버들에서 태고의 신비함과 가감 없는 속살을 엿볼 수 있다.
호숫가에 조성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다. 잔잔한 물결 속 햇살이 눈부시다. 그림자가 진 산, 햇빛을 받아 겨울임에도 형형색색을 드러낸 반대편 산이 서로 매력을 뽐낸다. 이 산 사이에 멋진 그림이 수면에 담겼다. 물속에 구름이 지나고, 산이 솟고, 왕버들이 곧은 자태를 한번 더 뻗었다. 자연이 담긴 호수가 여기인가 싶다.
전망대 계단에 앉으면 시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겠다. 사색에 잠기는 동안 걸림돌이 되는 소음이 전혀 없다. 고요함 속에 그날에만 볼 수 있는 주산지의 하루는 좋은 추억이 되겠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이야기를 펼쳐도 좋고, 보이는 왕버들을 무심히 쳐다봐도 지루함이 없다. 편안함 그 자체로 만족이며 행복이다. 조금 더 추워지고 계곡바람이 매서워지면 꽁꽁 언 주산지가 되고, 눈이 내리면 또 다른 매력을 뽐내겠구나. 눈 오는 날 주산지를 기약해 본다.
새벽 주산지에 드리운 물안개는 신비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주산지를 찾아갈 계획에는 꼭 '새벽 도착'이라는 조건을 달자. 또한 바람이 거센 날에는 물안개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 참고하시라.
[네이버 지식백과] 경북 청송 주산지 - 정성으로 물을 가두다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안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