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book

한강의 시/편지

by 우중래객 2024. 10. 23.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연세대 국문과 4학년이던 1992년에 윤동주 문학상을 받은 시 <편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정현종과 김사인의 한강의 시에 대한 심사평 "모두 능숙하다.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편지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 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홉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살,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편지/한강(국문과 4학년)

뽑은 느낌

당선작 "편지"를 비롯한 한 강의 작품들은 모두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는 무슨 선명한 조각과 또 달리, 앞으로 빚어질 어떤 모습들이 풍부히 들어 있는 에너지로 보인다.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신현정의 작품들은 차분한 호흡으로 젊은 시절의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전에도 만났던"은 친숙한 되풀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낯설고 낯설어 베일 듯이 예리한/낯설음을 찾아>같은 구절은 시적 자질을 짐작케 하는 좋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외에도 이창남, 차대식, 이창헌의 작품들이 읽을만 하지만, 이창남의 작품은 너무 진 술에 의존하고 있고 차대식의 작품은 산만한 게 흠이며, 이창헌의 작품은 언어조직에 긴장이 전혀 없다.

정현종 < 국문과 교수>

김사인 <문학평론가>


뽑힌 느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추억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그 때는 잘 몰랐다.

앓아누운 밤과 밤들의 사이, 그토록 눈부시면 빛과 하늘을 기억한다. 그들이 낱낱이 발설해온 오래된 희망의 비밀들을 이제야 엉거주춤한 허리로 주워담는 것이다.

...목덜미가 아프도록 뒤돌아보며.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쁨, 내 모든 눈물겨운 이들의 것입니다.

한강(국문과 4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사